베개자국
베개자국
행복의 뜨락
  • 이재선
  • 승인 2014.08.1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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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선 수필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얼굴이 절로 찡그려진다.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잔 탓인지 얼굴에 베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두드리고 화장수로 마사지를 공들여 해도 지워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출근을 해야 되는데 걱정이다. 화장으로도 감추어지지 않아 짧은 머리를 억지로 내려 얼굴을 가려봤지만 눈 가리고 아웅인 셈이다.

언제부터인지 베개자국이 나면 빨리 지워지지 않았다. 피부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을 했는데 자연스런 노화현상이란 말에 웃을 수밖에 없다. 얼굴에 난 베개자국은 눈에 보이니 그나마 괜찮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자국이다. 지우기도 어렵고, 지워졌는지도 모르고, 감추기도 어렵다. 그렇게 마음에 남은 자국이 내게는 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은 마음이 늘 촉촉하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 더 그렇다. 길 옆으로 어우어진 꽃들이며 나무, 들판의 곡식들은 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갈 때마다 호국원의 넓은 주차장은 차 세울 곳이 마땅치 않다. 새로 들어오는 영혼들로 항상 붐비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진을 보며 오지 못했던 동안의 일들을 모두 얘기해 드린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이렇고, 좋은 일에는 고맙다고 하고, 안 좋은 일에는 잘 돌봐 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투정을 부린다. 자리를 보존하고 앉아서 있는 넋두리 없는 넋두리를 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다.내게는 남다른 아버지의 사랑이 늘 따라 다녔다. 지나는 곳곳에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마다 아버지의 응원은 가장 큰 힘이 되었었다.

서울서 학원 다닐 때 쌀 한 말을 메고 홍은동 산동네를 이웃집 오듯 다녀가시고, 전화 목소리가 조금만 이상해도 다음날 영락없이 내 이름을 부르며 서 계시던 분이셨다. 바쁜 농번기에도 졸음 가득한 눈으로 쓰셨을 편지가 자주 배달되어 오곤 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 주위 친구들이 자식이 나 하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항상 받기만 해서 죄송스러웠는데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외손자를 안겨드린 것으로 조금이나마 돌려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이 없으신 아버지는 외손자를 안아 보시고 많이 기뻐하셨다.

외손자가 태어날 때부터 군대를 갔다 올 때까지도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방학만 되면 어린 손자를 데리고 전국 어디든 안 가는 곳이 없었다. 자연스레 아들은 외할아버지의 아들이란 말까지 들어가며 할아버지와 잘 융화되었다.

아들이 입대한 후에도 소리 없이 면회를 다녀오는 것은 다반사고 편지를 쓰는 것은 늘 아버지 몫처럼 되어 버렸다. 그때는 그것이 효도인줄 알았다. 자식에게 걱정을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조금만 아프셔도 병원을 찾았다. 그런 분이 갑자기 큰 병을 앓게 되어 입원을 하셨다.

모두 직장을 다니는 딸들은 휴가를 내서 교대로 간병을 하게 되었다. 위중하니 간병인을 쓰지 말라는 병원의 말에 우리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지쳐갔다. 종일 일을 하고 밤에 간호를 하러 가면 아버지는 독한 약기운으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 애를 먹기 일쑤였다.

난 눈꺼풀이 천근만근인데 아버지는 앉아서 주무실 생각은 안 하고 눈치만 보다 틈새를 이용해 링거 줄을 빼버린다. 제발 주무시라고 사정을 하면서도 원망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아버지는 내 아름다운 추억 속의 그 분이 아니었다. 단지 다루기 힘든 환자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이 당연한 거라고 믿는다. 하룻밤 뜬 눈으로 새우면 어떤가 잠은 언제든 잘 수 있는데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모른다. 지난 생일날 난 목이 메여 미역국이 넘어가질 않았다. 결혼 전에 부산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우리 고향에서 부산까지 오려면 꼬박 하루가 걸려야 올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게 먼 곳을 아버지는 밤기차를 타고 새벽같이 오셨다. 한 손에 미역과 소고기를 사들고 말이다. 제대로 앉아 보지도 못하고 농사일이 바쁘다며 그 먼 길을 곧장 되돌아 가셨다. 소고기 미역국 먹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눈물로 끓여 먹었던 그 기억의 미역국을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먹으려니 목이 멘다.

야속하게도 한나절이 지나도 베개자국은 없어지질 않는다. 앞으로는 바로 눕는 습관을 들여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오늘밤 또다시 내 맘대로 뒹굴며 잘 게다. 부모님께 잘해드려야지 하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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