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도 아닌 데서 꽃 이야기
밭도 아닌 데서 꽃 이야기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4.03.1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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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이정희 수필가

가랑비가 뿌린다. 불빛 새는 창가에 베틀 하나 올리면 수천만 명주 올이라도 자아낼 것 같다.
꽃잎 버는 뜨락에 물방아 살짝 돌리는 날은 수많은 꽃 이야기 여울지지 않을까.

빗줄기가 그려 둔 오선지에 음표가 새겨지면서 나긋나긋 다가오는 실여울 꽃비 밖으로 나왔다. 꽃밭에 이슬이 방울방울 하다. 꽃도 아니면서 꽃보다 먼저 핀다.

바람이 불면 꽃잎 속 하늘이 튕겨져 나갔다. 구슬이 쏟아지는 듯 뜰이 환하다. 거미줄마다 폭폭 새긴 진주는 새들이 토해 놓은 구슬처럼 혹은 별들의 꿈같이 예쁘다.

누가 둥글렸는지 모양도 제각각이다. 실 자락 하나 없으니 꿰어진 것도 맺혀진 것도 아니다. 잔디밭 속잎을 틔우고 덜 벙근 꽃잎을 매만지던 보슬비가 창문을 두드리면서 잠든 아기를 깨우기도 한다.

그럴 때의 하늘은 꽃잎이 날리는 듯했고 나비잠에서 깬 아기도 기척을 아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눈 감으면 안개 빛 호수가 펼쳐진다. 이른 봄 처음 돋는 새싹이 연하듯 가느다란 빗줄기는 세올 고운 리듬이었다.

날실만 드리운 채 하늘과 땅을 재면서 흩뿌린다. 봄비는 그래서 이름도 많다. 보슬비가 얼굴 간질이던 날은 뜨락의 꽃망울도 살짝 벌어졌다. 이슬비가, 있으라고 하면서 결 사뿐 늘이면 작은 새는 덩달아 구슬 물어 올렸다.

잔디밭 사이사이를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물오른 새싹이 다칠까, 꽃송이 잘못 터뜨려질까 살짝살짝 다녀갔다. 하늘하늘 날리는 것처럼, 사르르 사르르 속삭이는 것처럼. 비가 내려도 우산이 필요치 않은, 우산은커녕 비를 맞으면서 걷고 싶을 만치 아련한 정경이다.

한 번 날릴 때마다 새싹 돋는 이슬비, 흩뿌리면서 푸르러지는 실비와 꽃잎 새기는 보슬비 또한 각자의 역할로 부여받은 이름이다. 봄비는 언제나 웃는 꽃처럼 혹은 춤추는 나비처럼 살포시 뿌려대곤 했으니까.

차근차근 지난해 다녀간 순서대로 오곤 했었다. 뜨락에서 잔디밭, 그리고 숲속의 비둘기 날개를 쬐끔 적시며 조용조용 뜰 전체를 순례한다. 소낙비 뿌려대는 산돌림처럼 곳곳에 봄을 산란해 놓는 이슬비. 풀뿌리 나무뿌리 적시던 빗줄기가 얼마 후에는 또 다른 봄의 선율로 울려 퍼질 테니 자못 설렌다.

꽃밭 모서리 빨랫줄도 이슬 잔뜩 머금었다. 서 말 가웃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듯 가닥가닥 맺혔다. 해가 나면 무지개가 번뜩이고 구슬로 반짝인다. 거미줄이 구슬을 꿴 것인지 거미줄에 구슬로 맺혔는지 생각하다 보면 볕이 들고 구슬도 사라졌다.

꽃밭에서는 꽃보다 먼저 피더니, 거미줄에서는 보석으로 새겨지자마자 달아난다.장신구에는 관심이 없다. 꽃이면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이슬 때문이다.

새싹 맺힌 물방울은 자잘한 비취 모양이고 마고자 단추만한 물방울은 수천 카레트 다이아몬드다. 아무리 정교해도 햇살의 방향과 꽃의 빛깔로 효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비 오는 날의 구슬 촘촘한 꽃밭은 나만의 보석함이다. 누군가는 세트로 장만한다지만 변변한 보석 한 개도 없는 나는 그렇게나마 호사를 부린다. 이맘때면 꿈결처럼 흩날리는 가랑비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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