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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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3.08.2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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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 수필가.
이재선 수필가.

폭염과 폭우가 교차하는 요즘 날씨 때문에 에어컨하고 친하게 지낸다.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웬만하면 선풍기로 견디는데 올 해는 어쩔 수가 없다. 이런 날씨에 음식을 준비하는 주부들은 걱정이 많다.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기도 뭐하고 찬 음식만  준비하기도 그렇다.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고르고 있다. 둘이 살다 보니 음식을 조금한다고 해도 한번 두 번 먹다보면 버릴게 많아진다. 여름에는 특히 조그마한 부주위에도 상하게 되므로 주의를 요하게 된다.

예식장에서 집단 식중독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한두 번 식탁에 오른 반찬은 아까워도 버린다. 음식을 버릴 때마다 죄를 짓는 느낌을 받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친구들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랄 때 한 여름이라도 버리는 반찬은 없었다. 그 때 그 때 따온 오이나 호박을 무쳐서 할아버지, 아버지 밥상에 올리고 엄마와 우리는 양념 그릇에 비벼서 얼마나 알뜰히 먹었는지 모른다. 지금처럼 과일도 껍데기를 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수박도 겉에 파란 부분만 버리고 하얀 속은 오이처럼 절여서 반찬으로 먹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한번 만들어 식탁에 올렸는데 한 젓가락씩만 먹고 두 번 다시 먹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버리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의 여름을 만날 수 있었다.

반찬 봉사를 하다보면 혼자사시는 어른들도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20년 전 동네 부녀회장을 볼 때만해도 반찬을 만들어 가지고 가면 반가워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먹거리는 풍부해지고 고마움의 무게는 줄어든 것 같다.

요즘은 더워도 에어컨 옆에서 음식을 만드니 땀은 흘리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결혼했을 당시만 해도 시골은 불을 지펴 밥을 해 먹는 집이 많았다. 우리 집도 집안에 주방이 있고 밖에도 부엌이 따로 있었다. 어머니는 가스를 아낀다고 그 더위에 땀을 소매 깃으로 훔치면서도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찌개도 끓였다.

가스를 쓰면 눈치가 보이던 시절이었다. 담장 밑 키 작은 무궁화나무에 더울 때만 피는 무궁화 꽃이 안쓰러웠던 여름. 옆집 담장에 화려하게 핀 능소화도 한여름 뙤약볕을 이기지 못해 늘어져 있던 나의 고향이 눈에 선하다.

여름밤 새댁들과 둘러앉아 먹던 참외나 수박은 왜 그렇게 맛있던지 더 먹고 싶어도 형님들 눈치 보여 더 먹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과일이 냉장고 과일 칸을 가득 채우고 있어도 맛있게 같이 먹어 줄 형님들이 보이지 않는다.

더울 때는 얼음을 넣은 오이냉국이 사랑을 받는다. 어릴 적 집 앞에는 우물이 있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얼지 않는 고마운 샘이었다.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퍼 올려 만든 시원한 오이냉국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었다.

생 쑥을 뜯어다 모깃불을 피우면 메케한 쑥 냄새로 모기가 달아났다. 낮에 따온 옥수수를 삶아서 가족들과, 이웃 할머니와 함께 멍석에 둘러앉아서 먹던 옥수수는 요즘 먹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맛있었다. 엄마 무릎을 베개 삼아 별을 세다 잠든 그 시절 여름밤이 마냥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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