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에 대한 짧은 생각
휴가에 대한 짧은 생각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1.08.04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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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 수필가.
이재선 수필가.

아침 일찍 밭으로 갔다. 좀 흐린 날인데도 밭고랑에 들어서니 후끈 흙 내음이 올라온다. 부지런히 오이며 참외, 가지, 호박, 토마토를 따고 파도 뽑았다. 심어놓은 채소들을 마트에서 장바구니에 담듯 한가득 담아 가지고 나오는데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친정엄마를 드리려고 오는 길에 들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 한쪽으로 참깨 단이 줄지어 예쁘게 세워져 있다. 고추가 붉게 익고 참깨를 베기 시작할 즈음은 여름휴가철이다.

올 해나 지난해에는 코로나로 인해 휴가라는 개념을 버리고, 남 눈치 봐 가며 말도 못하고 슬며시 다녀오게 되었다. 휴가 계획을 세우며 설레던 기억이 아득하다. 휴가를 다녀왔다고 하면 주위의 눈총을 은연중에 받는다.

어린 시절 농촌에도 여름방학은 있었지만, 휴가는 텔레비전에서나 보고 듣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잠시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고추를 따야했다. 붉은 고추는 학교 육성회비도 되고, 운동화를 새로 살 수 있으며, 예쁜 새 옷도 얻어 입을 수 있는 귀한 작물이다.

귀한 작물은 분명하지만 어린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도시 아이들처럼 휴가는 아니라도 잠시 어디라도 가보고 싶었다. 이루지 못 할 꿈이라 생각하면서 저 태양이 뒷산으로 빨리 넘어가길 바랐다.

저녁이 되어야 모깃불을 피우고 평상에 앉아 엄마가 삶아주는 옥수수와 감자라도 실컷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농사짓는 사람은 여름휴가를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 다른 작물도 그렇지만 고추나 참깨는 제 때를 놓치면 망치게 된다.

고추는 떨어져 썩고, 참깨는 쏟아져 버리면 수확량이 거의 없다. 여름휴가는 먼 산 불구경일 뿐이다. 시댁이나 친정에 농사를 지어 바쁜 걸 알지만 모른척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휴가를 떠났던 기억이 난다.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고 태양은 우리에게만 쏟아지는 듯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저녁은 될 것 같았다. 휴가비를 아끼려고 아이스박스에 담아 온 음식들을 가지고 근처 그늘을 찾았다. 땀을 흘리며 한술 뜨느둥 마는둥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지만 휴가철이면 꺼내어 보고 웃곤 한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휴가철을 피해 다녔었다. 아이들에게 추억거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부모의 할 일 같아서 숙제처럼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기억 저편 어느 해 여름날 시댁 형제들은 삼복중 하루를 택해 물가를 찾았다.

모두 모여 앉아 휴가 다녀 온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등을 보이고 앉아 계시던 어머니가 들릴 듯 말 듯 한마디 하셨다. 늙고 죽어지면 원 없이 휴가를 즐길 텐데 일할 얘기는 하지 않고 휴가타령이냐며 한숨을 쉬셨다.

그 때는 젊은 사람들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서 서운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성인이 되고 나도 나이가 들고 보니 어머니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살기 어려운데 휴가란 사치라고 어머니는 생각하신 것 같다. 남들이 한다고 다 따라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젊을 때는 모른다. 그들도 장성한 자식들을 보며 본인의 나이가 들어야 알게 될 게다.
휴가는 어디서 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본인이 편하게 즐기면 그 것이 그 사람에게는 휴가다.

농사짓는 부모님 댁에서 참깨를 베어 털어보고, 입으로 들어오는 짭짤한 땀 맛도 느끼며 웃을 수 있다면 그 것이 휴가다. 별빛 쏟아지는 평상에 앉아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소리 내어 웃는 가족이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최고의 휴양지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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