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립스틱
빨간 립스틱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1.05.2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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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 수필가.
이재선 수필가.

립스틱 하나를 샀다. 첫 매장에 들어갔을 때 딱 눈에 띠는 색상이 있었다. 손등에 발라보고 슬며시 내려놓고 얼른 매장을 나왔다. 다른 색을 볼 수도 있지만 한번 마음을 둔 색이 있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매장을 몇 군데 다녀 보았지만 자꾸 그 색깔이 눈에 아른거렸다. 다시 그 매장으로 들어가니 눈치 빠른 여직원이 다가와 원하는 색상을 물었다. 난 그냥 가을 색이라고 말하면서 좀 전에 봐 두었던 립스틱에만 시선을 고정 시키고 있었다.

이 색깔이 마음에 드는데 너무 진해서 망설이고 있다고 하자 조금 연한 색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선택한 립스틱은 처음 마음을 준 빨간색이었다. 사가지고 가도 화장대 서랍만 차자하고 있을 걸 알면서도 결국은 사고 말았다.

외국을 나갈 때마다 다른 사람들 선물사기 바빠서 집에 돌아오면 내 것은 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든 나를 위한 선물을 하나씩 산다. 화장품이든 기념품이든, 먹을 거라도  좋아하는 것으로 고른다.

이번에 산 립스틱은 집에 가서 후회할 것 같지만 샀다. 화장대 서랍에는 연한 색깔의 립스틱이 많다. 짙은 색은 연한 색과 섞어서 바르기도 하지만 잘 바르지 않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직업이다 보니 모두 내 입술만 바라 볼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진한 색은 피해왔다.

이렇게 립스틱 하나 고르는데도 온 신경을 쓰고 남을 의식하는 데는 나름 사연이 있다. 딸 부잣집 맏딸이라 어려서부터 지금껏 모든 언행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 정말 착하구나." “역시 맏이라서 다르구나." 하는 말을 평생 듣다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제는 내가 못 견딘다.

잘 웃고 떠들다보니 남 보기에는 외향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무척 소심한 편이다. 나 같은 사람을 또 만났다. 조카딸은 가끔씩 배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을 다닌다. 특별한 병명이 없어 더 걱정이 되었다. 큰 병이 아닐까 했는데 의사 말이 착한아이 콤플렉스 같다고 했다. 

조카딸은 저 보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이 한명 있다. 동생은 막무가내로 누나 것은 물론이고 누구 것이든 자기 맘에 들면 가져야한다. 어렵게 출산하고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자란 둘째를 모두 위하기만 한 것이 화근이었다.

맘에 들지 않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떼를 쓰고 운다.그러다보니 어른들은 누나가 양보하라고 하면서 늘 “ 착하지“ 란 수식어를  붙였다. 요즘처럼 형제가 많지 않은 가정에서 착한아이 콤플렉스라는 병명을 얻게 된 어린 조카딸이 측은하고 안쓰러웠다.

앞으로는 조카딸에게 착하다는 말 대신 “잘했다", “예쁘다"란 말로 바꾸어 칭찬을 해주리라.우리나라 사람들은 착하다는 말을 양념처럼 많이 쓴다. 착하니까, 착해서 그래, 착하잖아, 착하니까 좀 참아, 착하기도 하지, 착하다는 말 속에는 많은 뜻이 담겨있다.

착하니까 넌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는 보이지 않는 무기가 숨어있는 것이다. 듣는 입장에서 보면 좋은 얘기 같은데 기분은 별로 안 좋게 들린다. “아니다"라고  하고 싶은데 그 착하다는 말 때문에 목울대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기 일쑤다.

이런 일들이 오래 반복되다 보면 습관이 된다. 우습지만 뻔뻔하리만큼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습관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이제 당당함이 겸손함으로 바뀌는 나이에 와 있다.  

그래서 좀 손해 보더라도 지금처럼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리라. 조카딸에게도 착하다는 말은 좋은 얘기라고 말해 줘야겠다. 서랍 속에 있는 빨간 립스틱은 겸손함의 증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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