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늬 장화
꽃무늬 장화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0.08.0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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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그이는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읍내에서 목공소를 하면서 넘치지는 않아도 부족함 없이 살아 온 나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결혼 후 시골살이를 할 적에 텃밭은 오로지 그이 몫이었다.

집 안에 살구며 대추나무가 자라는 것도 몇 년 뒤에 알 정도로 무심한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혼자 해 냈다. 땅 한 평 없이 남의 터에서 농사를 짓던 시절의 궁핍했던 생활이 잊히지 않았는지 땅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결혼 초 빚으로 장만한 밭을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살피고 다녔다. 그 후 열심히 저축하고 생활한 덕분에 몇 군데 논과 밭을 더 장만했다. 몇 만평 토지를 소유한 것처럼 부산스레 움직였다. 산책은 물론 나와 동행하는 드라이브 코스도 소유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 지주가 산마루에 올라 농토를 바라보는 마음이 저와 같았을까? 주말 아침, 그이가 농장에 가자며 보챈다. 퇴직 후 행보를 정한 듯 작년에 시골에 농막을 짓고 터를 다져 이백여 평의 밭을 만들었다.

집에서 할 일이 있다며 거절하는 내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농막 안에서 일하라고 거듭 청한다. 깨를 심어야 하는데 혼자서 무슨 재미냐고 옆에만 있으라는 애절함에 마음이 움직였다. 점심을 챙기고 노트북과 읽을 책을 가방에 쌌다.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물끄러미 바깥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글을 썼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땀을 비오듯 쏟아 내며 그이가 들어온다. 큰아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지인에게 줄 파를 뽑으려고 나갔다.

장화를 갈아 신으러 뒤켠으로 갔다. 진분홍 꽃무늬 장화가 신기했는지 아들은 발 세 개를 모으라더니 사진을 찍는다. 농장이 생긴 뒤 한참 뒤에 그 곳을 가 봤다. 나이가 들고 보니 젊은 시절 지나쳤던 유기농 채소의 귀함과 기른이의 정성도 보였다.

그이는 내가 좋아하는 쌈채를 종류별로 심고, 버리지 않고 먹는 것으로도 행복해 했다. 그이를 도와 흙을 만지는 일도 조금씩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밭에 들어서는 나를 향해 장화 한 켤레를 건넸다.

가게에서 내 신발을 고르며 함께 할 많은 것들을 꿈꿨을 그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농장에만 가면 말이 많아진다. 나무를 옮겨 심은 이야기부터 고추를 따는 방법과 나를 위한 아삭이 고추가 심어진 장소까지 일일이 가르쳐준다.

이 남자가 '이렇게 말이 많았었나'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저녁나절 마지못해 마실나간 농장에서 논두렁에 그득한 개구리 울음소리를 실컷 듣고 오기도 한다. 운 좋은 날이면 밤별들과 조우한다.

농장 뒤 켠에는 파란색 긴 장화와 꽃무늬 장화가 나란히 놓여 있다. 노후를 이 땅에서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화 한 켤레, 꽃무늬 장화에 발을 쏙 넣으며 질퍽한 밭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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