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치매
디지털 치매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13.06.07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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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선 수필가.

아버지의 휴대전화가 고장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논에 갔다가 물에 빠트렸다고 하셨다. 배터리를 분리해서 물기를 말린 다음 켜야 되는데 그냥 켠 것이 원인이었다. 같은 종류만 고집하셔서 수리가 되면 다행이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새 것으로 바꿔야 할 형편이었다.

대리점을 방문해보니 예상대로 수리가 불가능 하다고 했다. 최대한 비슷한 모델로 교체를 해달라며 앉아 있는데 대리점 직원이 아버지 번호를 물었다. “네? 저기..." 갑자기 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단축키만 누르고 통화를 하다 보니 굳이 외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서 확인하고 번호를 가르쳐 주며 직원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버지 번호도 모르는 딸을 뭐라고 생각할지 정말 민망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퀴즈 문제 중에는 치매에 대한 퀴즈가 있었다.

친한 사람의 전화번호도 기억 못하고 노래방 반주 화면의 가사 자막이 없으면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으며, 계산 능력이 자꾸 떨어지는 증상이 어떤 치매냐는 것이 문제였다. 내 상식으로 아는 것은 혈관성 치매와 알츠하이머밖에 없는데 뭐가 또 있는지 궁금했다.

답은 디지털 치매라는 신조어였다. 휴대전화나 인터넷의 발달로 저장된 번호를 찾거나 컴퓨터에 저장된 문서를 꺼내 보기만 하면 되니 복잡한 일들을 외우지 않아도 하고 있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라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갔을 때가 중학교 2학년으로 기억 된다. 주소 한 장 들고 몇 번의 시내버스를 타고 묻고, 묻기를 반복해서 친척집을 찾아갈 때 친절하게 버스번호까지 알려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좀 용감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네비게이션만 있으면 자동차를 목적지 앞까지 데려다 준다.

지도를 펼쳐 볼 일도, 주변에 큰 건물이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필요도 없다. 또 누구에게 물어봐도 자세히 가르쳐 주는 사람도 드물다. 혼자 알아서 해결하다보니 디지털의 힘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지만 머리는 점점 단순하길 바라는 것 같다. 건망증이 심한 나는 가끔씩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면 몇 사람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지 손꼽아 보기도 한다. 자막 없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몇 곡인지, 책을 덮고도 낭송할 수 있는 시가 있는지, 적은 수의 암산을 계산기 없이 할 수 있는지 끝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정확하게 답변 할 수가 없다.

입으로 외우고 손으로 쓰고 머리로 생각하는 습관이 예방법이라는데, 꼭 나를 두고 하는 소리 같다. 균형 있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로운 생활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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