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자고난 일기
하룻밤 자고난 일기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2.03.1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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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 수필가.
이재선 수필가.

숙소의 넓은 창으로 야자수 나무를 내려다본다. 야자수 나무가 넘어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바람이 분다.육지에서는 태풍 때 아니면 보지 못할 광경이다. 바람이 한 방향으로만 불어오는지 한쪽 이파리는 거의 떨어지고 남은 이파리도 회색빛으로 변해있다.

그러나 반대편 이파리는 파란색을 띠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를 저들은 알고 있는 것 같다. 분별없이 바람에 밀려왔지만 설렘을 만끽하고 싶어 길을 나선다. 오늘따라 눈, 비, 바람 덕분에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오랜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수다는 마음을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날씨와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은 현지인과 다르게 여행자에게는 멋과 낭만을 심어준다.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너그럽게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쾌청한 날씨보다 오래도록 기억하며 이야기할 것 같은 오늘이 고맙다. 바람을 가르며 녹차 밭을 지나 들어선 카페에는 눈요기보다 입요기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많았다. 그들의 틈새에서 낭만 따위는 물 건너가고 드링크 마시듯 녹차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오면서도 불평보다는 각자의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제약된 일상을 힘들어하던 차에 훌쩍 떠나온 동네에는 우리를 많은 이야기 속으로 안내했다. 평범한 일상을 수상한 바이러스에 빼앗긴 우리의 매일을 숙소 바닥에 친구들은 크게 펼쳐 놓았다. 조금 덜 힘들게 이겨내는 방법이 나름대로 있었다.

밖에서 활동하는 것이 몸에 밴 내게 바이러스는 참기 힘든 스트레스다. 나가고 싶어서 늘 현관을 처다 보는 버릇이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다 보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늘 밥만 주던 어항속의 물고기도 관찰하고 화분의 꽃들 상태도 살펴보았다.

지난여름부터 꽃을 피우고 지기를 반복하는 제라늄이 기특해서 사람에게 말하듯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분 관리를 잘못하면 봄이 되었을 때 죽거나 시들어 제구실을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이런저런 집안일들을 하며 예전에는 후딱후딱 해치워서 자세히 알지 못한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현관 바라보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숙제를 혼자 풀어낸 초등 일학년 조카가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는 다음날 동백 수목원을 구경 갔다. 스케치북에 빨간색 크레파스로 조카딸이 열심히 그렸던 꽃 같이 붉은 동백꽃은 지천에 가득했다.

붉은 동백꽃은 코로나로 신음하는 우리네 가슴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붉은 꽃 속에 노란 꽃술은 희망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 동백꽃은 희망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수목원을 뒤로했다.
그렇게 1박2일을 한나절 다닌 듯 아쉬워하며 숙소를 나섰다.

뭐 두고 오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라고 하자 옆 친구가 “나 있어"한다. 가져오라고 하며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자 친구는 웃으며 “아쉬움을 두고 와서"라고 말한다. 우린 서로를 처다 보며 네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바람결에 실려 왔듯 바람결에 실려 돌아간다. 집으로 향하는 마음도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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