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그네의 스케치
겨울 나그네의 스케치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2.01.1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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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이정희 수필가.

겨울 호수에 눈이 내렸다. 도요새 살던 덤불숲이 산새알처럼 솟아올랐다. 둔덕의 억새밭도 뽀얗게 섬으로 떠올랐다. 골골마다 설경은 그린 듯 아름답고 하얗게 뒤덮인 원시림을 보고 있으니 발걸음도 깃털마냥 가볍다.

아무도 없는 골짝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천고의 신비를 들춰 보는 이 기분! 하필 인적마저 드문 오후, 세상 혼자 가는 것 같은 착각이야말로 눈 쌓인 겨울 호수의 최고 판타지다.

호수에는 나와 엇비슷한 부류가 많다. 가장 많이 띄는 건 물가의 청둥오리다. 바람 부는 날 보면 떼로 모여 자맥질이다. 물속을 버르집고 허공을 차오르면서 겨울을 물어 뱉는다. 그러다가 봄이면 일제히 떠나는 수많은 철새…….

그들이 사는 호숫가 모퉁이도 겨울 한 철 나그네 섬이다. 자맥질을 하다가 잠깐 가서 쉬는 걸 보면 아지트가 분명하나 여느 때는 보이지 않는다. 물이 많을 때는 파묻혀 있다가 얼추 빠지면서 이루지 못한 꿈처럼 드러난다. 떠돌이 철새가 떠돌이 같은 섬에 머물러 있다.

그럴 때마다 겨울 나그네로 정착하는 것 같은 환상이 스스로도 아름다웠다. 눈도 바람에 묻어 여기까지 왔다. 석 달 열흘 두고 만들어진다니, 까마득히 먼 허공 어디쯤서 날아왔을 것이다. 기슭을 돌아가면 둠벙이 나오고 거기 물조차도 나그네새 때문인지 자박자박 흐른다.

모퉁이만 돌아가도 사철 푸른 소나무가 흔했으나 물가에는 앙상한 포플러와 자작나무뿐이다. 둔덕의 나무도 한 그루 나목으로 묵묵히 바람의 메시지를 받아 적는다. 외로운 속에서 추워도 떨어질 잎 하나 없이 빈 가지로 연주하는 겨울 소나타.

오솔길이 나왔다. 십여 분쯤 갔을까, 눈 속에 파묻힌 전설 같은 얘기가 들렸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무도 부르지 못한 노래고 맨 처음 눈에 띈 별이 가장 빛난다. 눈 속에는 우리 듣도 보도 못한 뭔가가 잠재되지 않았을까. 내 발자국을 필두로 수많은 길이 생겨날 것이다.

신비스러움도 잠시 오가는 발자취 때문에 칙칙한 땅이 드러날지언정 풍경은 환상이었다. 가랑잎이 버석거린다. 가으내 낙엽과 단풍이 한 줌 뗏장으로 묻혔으나 봄이면 다시 푸르러진다. 우리 늘 한 번 가면 그만인 삶이었기에 더 큰 의미를 남기고 싶어 했다.

눈 쌓인 세상 들어 올리면 꿈나라가 될 것 같은 환상도 녹으면서 사라진다. 우리 나그네 삶을 동경하는 것도 가지 못한 길에의 설렘 때문일까. 지난가을 떨어진 씨앗도 눈을 뒤집어쓴 채 하루하루 기다릴 테지.

답답해도 그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망울을 새길 수 있다면서 그렇게. 눈보라가 틔워 낸 길은 끝나고 산자락이 보였다. 비알을 헤쳐 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고 온 길도 만만치 않다. 되돌아오면서 본 게 눈 속에 파묻힌 겨울 내기 새싹이었다.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채 휘파람을 불어대고 둔덕의 억새도 보푸라기 날리며 겨울 소나타를 연주했다. 겨울이 추워야 봄이 따스하다는 것도 잊을 만치 춥다 보면 봄이 되었다. 겨울이면 꽃눈을 준비하고 추위를 이기는 나무처럼 우리 또한 내일을 기다리면서 소망의 꽃눈을 새긴다.

겨울 초입에서 봄 운운하는 격이나 소망 또한 절망에서 싹튼다.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운명 역시 강도가 약해진다. 도요새가 허공을 저미며 날아간다. 겨울 하늘을 껴안을 수 있어야 진정한 새다. 지난가을 떨어진 씨앗도 눈을 뒤집어쓴 채 봄을 기다리겠지.

답답해도 그 속에서 아름다운 꽃망울을 새긴다. 겨울이 없으면 봄은 절박하지 않듯이 시련이 아니면 영광의 삶은 누리지 못했다. 겨울나무조차 잿빛 하늘 밑에서 초록을 준비한다. 차가운 눈 속에서 봄을 아로새기는 꽃씨마냥 봄 때문에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눈물로 노래하는 겨울 나그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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