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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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1.07.0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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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타지에서 학교 생활을 하는 둘째 아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장을 봤다. 하필이면 지인과의 약속도 이른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다. 밖에서 사 먹으라고 했더니 집밥이 먹고 싶단다.

조금 편하게 농막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으라고 하니 그냥 집밥이란다. 빠르게 메뉴를 정해 총총거리며 장을 보고 식탁위에 사 온 것을 풀어 놓는다.

지인과의 만남까지는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남편이 무공해로 정성껏 기른 오이와 호박으로 무침을 만들고 갈치도 굽고, 조리대 앞에서 정신없이 바쁘다.

예쁜 접시도 꺼내서 상차림을 하니 어느 새 풍성해졌다. 아들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도 보글보글 끓인다. 김치가 맛있어서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풍미가 깊다. 묵은 김치로 끓인 찌개맛은 정말 일품이다.

원재료인 김치는 매년 시누이들이 주는 데 남편과는 싸워도 시누이와는 싸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더운 여름 불 앞에서 요리하다보니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하다. 그래도 밥 짓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지는 공기가 싫지 않다.

얼마 전 방랑식객으로 불리며 방송활동을 하던 자연요리가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를 생각하면 '어머니의 정'으로 자연의 재료를 이용해 밥상을 차려내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에 대한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길에서 인연을 맺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음식을 대접한다.

길 위에서 만난 어머니와의 이야기도 함께 있는 영화 '밥정'은 밥으로 정을 나누는 그의 인생을 다큐멘터리로 보여 주었다. 요리가 아닌 정을 차려내는 그의 선한 웃음은 잊히지 않는다.

두 아들이 객지생활을 하고 남편과 둘이 살면서 밥 짓는 일이 뜸해졌다. 언제부턴가 아침을 우유 한 잔으로 대신하는 일상이 편해졌고, 비상용으로 즉석밥을 준비해 놓았다.

저녁 한 끼만 해 먹을 정도로 밥상을 차리는 일이 줄어 들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집에 오는 날이면 부산스럽다. 밥이 많이 남아 있어도 밥을 새로 짓는다. 몇 가지 찬을 만들고 집 안에 모처럼 도마질 소리가 들린다.

음식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진다. 내 옆을 끝까지 지켜줄 이는 남편인데 아직은 자식 입에 밥 한술 더 들어가는 게 좋은가보다.

오붓이 식탁에 앉아 남편은 아들에게 니가 자주 와야 밥을 얻어 먹는다고 서운한 마음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시골집 마당에 갖가지 푸성귀가 있어도 관심이 없었다.

무공해로 기른 채소를 누가 뽑아가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재료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알게 되면서부터 버리지 않고 먹으려고 애썼다.

자연이 준 그대로의 재료에 남편의 정성으로 기른 것이기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재료로 밥상을 차리고 나면 괜히 마음이 뿌듯하다.나이가 든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세상 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기기도 한다.

밥을 짓는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여기며 자연의 고마움도 느낀다. 식탁 위에 금방 밭에서 따 온 상추며 고추, 오이가 신선하다. 남편 밥그릇에 마음을 채우며 밥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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