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
친정엄마
  • 음성뉴스
  • 승인 2021.05.1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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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서 뜯어 온 열무와 미나리가 다듬지 않은 채로 봉지에 담겨 있다. 욕심내 가져 오라고는 해 놓고 이틀째 그대로다. 할 일이 많은 지라 시간이 통 나질 않는다.

양 손에 봉지를 들고 엄마한테 가서 다듬어 달라고 하니 흔쾌히 놔두고 가란다. 주말에도 수업을 하고 있어서 두 시간 정도 후에 다시 오니 열무는 잘라서 봉지에 담아 두셨고, 미나리는 마지막 손질을 하고 계셨다.

맛있게 담가서 가져다 드리겠노라며 돌아서는데 화장지 한 롤을 손에 쥐어 주신다. 서른 중반의 이른 나이에 혼자 되신 엄마는 자식 삼남매를 키우셨다. 아버지가 안 계셨지만 어렵게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가 공장에 다니시면서 생활을 이어가셨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최선으로 자식을 먹고 입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나이에 남편 없이 산다는 것이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내 나이 오십이 넘고부터 엄마의 삶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배운 것이 많지 않아 자식 교육에 열을 내지는 않았지만 '엄마'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셨다. 일흔 넷의 엄마는 등이 약간 굽으셨고, 기억력도 예전만 못해서 인지기억에 도움이 되는 약을 드신다.

몇 년 전만 해도 동네를 운동 삼아 돌아다니면서 폐지를 줍기도 하셨다. 집 앞에 쌓여 있는 폐지를 보면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만하시라고 채근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운동을 하시니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요즘은 기운이 예전 같지 않은지 폐지는 못 줍고 종이컵을 모은다. 함께 식사하러 가는 식당에서도 종이컵만 보면 주워 오신다. 예전보다 엄마에게 자주 들르고 전화도 자주 한다. 전에는 몰랐던 안부인사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엄마의 하루 일과를 체크하게 되었다.

표현이 서툰 딸의 물음에 무뚝뚝한 엄마의 대답이지만 혼자서 끼니를 챙겨 드셔서 고마울 따름이다. 엄마의 살림살이는 빛을 잃어서 설거지꺼리가 쌓이고 냉장고에 음식은 상하고 집 안도 엉망이다.

그래서 반찬거리만 전해 주려고 들렀다가도 바삐 움직여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상한 음식을 버린다. 처음에는 잔소리를 했는데 지금은 아무 말 없이 부지런히 치운다. 그러면 엄마는 옆에서 본인이 치운다며 빨리 가라고 성화다.

가까이 살아도 바빠서 가지 못했는데 틈나면 들르는 딸이 돌아갈 때면 빵 한 개라도 꼭 챙겨 주신다. 이제는 자식에게 기대어 살지만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진다.

종이컵을 얼마나 모으면 화장지로 바꿀 수 있는 걸까? 오물이 묻은 종이컵을 모으면서 엄마는 행복했으리라. 바꾼 화장지를 딸의 손에 쥐어 줄 수 있으니 손이 더러워지는 것은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소일거리를 들고 엄마에게 달려간다.

수업에 필요한 재료 준비를 할 때 반복적인 일을 엄마에게 부탁한다. 늙어 가는 엄마가 계신 집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딸을 생각하며 챙겨주는 검은 봉지에 엄마의 마음이 가득 담겼다. 햇빛에 눈이 부셔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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