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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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1.03.3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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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웅 수필가.
서민웅 수필가.

그날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손자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깨에 멘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손에 들었던 액자 든 종이봉투를 책상에 놓으려는데 봉투가 없었다. 아차! 합정역 승강장에서 손자를 기다리며 의자에 기대놓았던 액자 봉투를 챙기지 않은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액자 봉투는 그대로 두고 손자의 손만 잡고 온 것이다.

손자를 만나기로 한 합정역 승강장 8-1 승차대 근처 의자에 앉아서 전동차가 들어오길 기다렸었다. 그곳이 손자와 만나기로 장소였다. 약속 시각이 반 시간 넘게 남아, 들고 있던 액자 봉투를 의자 옆에 기대놓고 책을 꺼내 읽으며 손자가 오길 기다렸다.

약속 시각이 되자 손자를 데리고 온 딸 전화가 왔다. 전동차에서 내렸는데 6-1 승차대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6-1 승차대는 내가 의자에 앉으며 앞에 승차대 번호를 확인하고 딸에게 그곳으로 오라고 전화한 장소였다.

급히 읽던 책을 가방에 넣고 가방을 들고 일어나 앞의 승차대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아뿔싸! 8-1을 6-1로 잘못 보고 알려준 것이다. 얼른 가방을 메고 6-1쪽을 바라보니 딸과 손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빨리 달려가서 주말에 할아버지 집에 놀러 오는 손자의 손을 잡고 딸과 헤어졌었다. 합정역을 떠난 지 반 시간이 지났다. 종이봉투도 낡고 액자도 연필 인물화를 그린 습작 그림일 뿐만 아니라 의자 옆에 기대놓아서 아무도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역으로 찾아가는 것보다 직원에게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 빠른 해결방법이었다. 인터넷을 켜고 합정역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남자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8-1 승차대 근처 의자에 놔두고 온 액자에 관해서 설명하고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은 바로 확인하겠다며 내 전화번호를 불러 달라고 했다. 직원은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내려갔다 와서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그 시간이 나에게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전화가 왔다.“여자 얼굴 그린 그림이지요?" “맞아요." “시간 되는 대로 신분증 가지고 역무실로 오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찾으러 갈게요."

이것이 바로 그 전날 오후 4시 반부터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날 오후에 합정역 역무실을 찾았다. 역무실은 없고 고객서비스센터가 있었다. 이름을 바꾸고도 그대로 역무실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일부 직원의 자리는 비어 있고 사무실은 조용했다.

문 앞에 직원이 물었다.“무엇을 도와드릴까요?"나는 유실물을 찾으러 왔다고 말하며 사무실을 한번 돌아보자 건너편 캐비넷 위에 잃어버린 액자 봉투가 얹혀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 캐비넷에 얹힌 봉투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자 캐비넷 앞에 앉은 직원이 그것을 내려서 가져왔다.

그 직원은 신분증과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간단히 유실물 처리서류를 정리하고는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액자를 찾으니 아끼지 않던 것인데도 더 아까운 물건처럼 생각되었다. 액자는 도서관에서 평생학습 교육 시간에 연필 인물화를 그린 것으로 학기 말에 도서관 통로에 전시했다 가져온 것이었다.

한 학기 배웠다는 통과의례로 보름 동안 전시하고 철거한 액자로 별로 애착은 없는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잃어버리니 내가 그린 그림이 버려진다는데 그럴 수 없다는 애착이 생겨났다. 봉투에서 액자를 꺼내 보았다. 잃어버렸던 사연이 붙으니 그림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그림 속의 여자 얼굴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도 마치 새로운 그림을 보는 느낌이었다.그때 유실물 처리를 한 직원이 물었다.“미술가세요?"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도서관에서 배우는데 얼마 되지 않았어요." “잘 그리셨어요. 좋~습니다."

도서관에서 함께 배운 열댓 명의 그림 중에서 가장 쳐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직원은 진심으로 말하며 그 연세에 부럽다는 것이었다. 괜스레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액자를 들고나오면서 어떤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생전 처음 듣는 미술가라는 말에 한편 미술가가 된 것처럼 뿌듯해 오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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