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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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1.03.0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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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거실 한쪽에 놓인 액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얼마 전의 감동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시화를 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진다.올해는 우리 부부에게 특별하다. 스물다섯 해 인연을 이어 온 은혼식이다. 두 아들과 남편에게 일찍부터 여러 번 기념일을 잊지 말라고 말해 두었다.

어릴 때부터 거창하지는 않지만 기념일을 미리 알려 주고 챙길 수 있도록 해서인지 잘 하는 편이다. 아들을 키우면서 표현력 없고 무뚝뚝하다고 책망하기 보다는 하나씩 알려 줬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생일을 기억하고 가족이 함께 지냈다.

두 아들은 초코파이에 요플레를 뿌려 만든 케이크를 준비하거나 카스텔라에 초를 꽂기도 했다. 때론 내가 연출을 하며 TV에서처럼 둘이 케이크를 노래 부르며 들고 오게 시키기도 했다. 둘째가 가끔 투덜거리며 자기 친구들은 이렇게 안 한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잘 해왔다.

설 연휴가 끝난 일주일 뒤가 결혼기념일인지라 서울에 거주하는 큰아들에게는 차비 아깝다고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당일 저녁 무렵 큰아들이 집이라며 전화를 했다. 모처럼 외식을 한 후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했다.

두 아들이 함께 준비한 케이크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특별 주문한 케이크에는 신랑 신부의 모습과 '엄마 아빠는 좋겠다! 이런 아들들 있어서'라는 문구가 있었다. SNS에서 딸들이 챙기는 사진을 보면서 부러웠지만 받고 싶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이어서 취업 준비 중인 큰아들이 직접 만든 '25'라는 제목의 시화는 감동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면서 생각했을 그 마음이 오롯이 전해졌다. 2월 마지막 주에는 둘째 아들과 가까운 곳으로 바다를 보러 갔다.

큰아들과는 가끔 나왔지만 둘째와는 처음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바다를 보고, 차를 마시는 순간이 행복했다. 성년이 돼서도 가족 여행을 가고, 엄마를 위로해 줄 줄 아는 따뜻한 감성을 지닌 아들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거기에 말벗으로 노후를 함께 보낼 남편까지 더없는 행운이다. 둘째도 개강을 앞두고 집을 떠났다. 남편과 둘만 남은 집은 고요하다. 저녁 한 끼는 밥상을 차리고 함께 먹는다. 그릇 욕심은 없지만 선물로 받은 예쁜 그릇에 반찬을 담는다.

예전에는 반찬 통째로 꺼내 먹던 모습에서 달라졌다. 내용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이 바뀌었다. 형식은 예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지나침이 없는 형식은 꼭 필요하다.

두 아들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단단한 그릇으로 커준 게 고맙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은 서로를 잘 담아내는 그릇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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