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
가을 단상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0.11.18 22: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구불 구불 옛 길이 주는 정겨움이 산빛에 그득하다. 일과를 마친 후 사정리 저수지를 끼고 돌아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천천히 운전해도 20여분 정도로 짧은 거리지만 내가 온전히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요즘은 가을 단풍에 흠뻑 빠져서 감탄사를 연실 내뱉으며 일주일에 두 세 번 이 길을 지난다. 수업을 하러 갈 때는 신도로를 달려서 가지만 귀갓길에는 꼭 옛 길로 오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를 끝내고 돌아갈 때 몸과 마음을 비우고 오롯이 풍경에만 눈길을 준다. 계절마다 다른 색감으로 저수지 주변을 맴도는 산등성이의 아름다움도 만끽하고, 바람에 나부끼는 가로수의 잎새에도 마음을 빼앗긴다.

열흘 전 단풍은 최고 절정을 이루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다채로운 색깔을 나무 한그루에서 발견했을 때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번 가을에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하나 하나 또렷이 보였다.

예전에 한동안 이 길을 지나길 꺼렸던 적이 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울했다. 구불 구불 몇 차례 저수지를 끼고 돌다가 갑자기 물을 보면 나를 잡아 끄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래서 그 때는 운전대를 꽉 잡고 긴장을 하면서 조심스레 앞만 보고 달렸던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이 힘들어서 주변의 풍경을 볼 여유도 없었다.낮인데도 저수지는 어두워 보였고,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아찔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올해 초 코로나로 일상이 바뀌면서 변화가 있었다. 2월 초 한 달은 집 밖에도 나가지 않고 의욕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기운을 차리고 그 동안 못했던 집안 정리를 하나씩 했다. 일거리를 찾고 보니 할 일이 보였다.

자료정리부터 미뤘던 공부까지 하루를 바쁘게 지냈다. 평소 내 신념은 '준비하는 자만이 기회를 얻는다'인데 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준비하다 보니 수업할 기회도 생겼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알게 모르게 받았던 상처도 치유하며 안정을 찾았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달려 있다더니 그 말이 진리임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인생을 계절에 빗대어 볼 때 나는 지금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접어 든 듯하다. 앞만 보고 달렸던 청춘을 지나 중년이 되고 보니 옆이 보인다.

바깥일 한답시고 허투로 하는 살림살이에도 타박없이 묵묵히 곁을 내 준 옆지기가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 소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지만 어려운 고비 앞에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고마운 사람이다.

봄과 여름을 지나 튼실한 열매를 내어 주는 과실나무처럼 둘이 만나 이룬 가정은 점점 더 단단해져간다. 결혼 후 나는 붉게 물드는 단풍처럼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채색되어가고 있다. 가을 들판처럼 풍요로운 중년의 길목에서 한걸음 비켜서서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