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사과 한 개
초록 사과 한 개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0.10.0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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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순 수필가.
이명순 수필가.

수업을 끝내고 가방을 챙기는데 한 학생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초록 사과 한 개를 준다. 간식으로 먹으려고 사온걸 주나 해서 집에 가서 먹으라고 했더니 나를 주려고 가져 왔단다. 고맙다고 말하며 일부러 사 온 거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키운 걸 땄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라 의아해서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시장 구경을 갔다가 사과나무 묘목을 한 그루 사다 심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사과가 두 개 달려서 한 개는 본인이 먹고 다른 한 개는 나를 주려고 가져 온 것이었다. 순간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봄이면 고추나, 토마토, 가지 등을 심거나 자국의 채소를 조금씩 심어 먹는 것은 알았지만 과일 나무를 심는 경우는 처음 봤다. 바로 수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최장 4년 10개월까지 가능하다. 한국 체류 기간 내에 빨간 사과를 몇 번이나 딸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는데 그 학생은 어떤 마음으로 사과나무를 심었을까.

우리는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고 오늘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말을 자주 인용하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가져야 할 때 스피노자의 이 명언을 떠올린다. 이 학생도 한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며 희망의 메시지로 사과나무를 심은 건 아니었을까 내 맘대로 추측해봤다. 그리고 그 사과 한 개를 소중하게 냉장고에 보관했다.

일주일 후 그 학생을 다시 만났을 때 왜 사과나무를 심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고향인 방글라데시 집에는 땅이 넓어서 과일 나무가 많다고 한다.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구아바, 잭플릇 등 다양한 과일 나무가 있어서 늘 과일을 따고 먹을 수 있는데 한국에는 고향의 과일 나무와 같은 품종을 심을 수 없어 주변의 조언을 구해 사과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자신이 본국에 귀국할 때까지 잘 길러보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 학생에게 사과나무는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기반이자 한국 생활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또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그렇게 가꾼 사과나무에 올해 처음 두 개의 사과 열매가 맺혔고 그 중 한 개를 내게 선물했다니 내 가슴에 파문이 일렁였을게다.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에서 낯선 언어를 배우며 만나는 사람들, 생소한 음식 그리고 힘든 일까지 하며 견디려면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할 것이다. 같은 나라 친구들과 어울려 얘기하며 술 한 잔을 나눌 수도 있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사과 나무를 보고 고향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의지했으리라.

그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왔다. 젊은 나이니 무엇인들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다. 풋사과 같은 풋풋함이 그의 얼굴에서 묻어난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그 학생의 젊은 날이다. 이르게 따 온 초록 사과가 그 학생의 현재 모습이라면 나중에 본국에 돌아가 생활할 그의 장년기는 빨간 사과로 화려하게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풋풋한 초록 사과의 싱그러움과 설렘을 한국에서의 추억으로 그가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한 그루 사과나무가 그에게는 희망의 나무처럼 푸르게 자라 내년에는 더 많은 열매가 맺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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