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거리두기
사랑의 거리두기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20.05.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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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 수필가.
이재선 수필가.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달력에 표시해 놓았는데도 별말 없이 식사하고 갔다 올겨하며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본다. 이제는 서운하지도 가슴이 아리지도 않다.

이렇게 무덤덤하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감성적인 나는 기념일을 소중히 생각하고 기념일에 맞게 적절한 선물을 잘 챙기는 편이다.

그런 반면 남편은 기념일에 별 관심이 없다. 늘 마음이 중요하다는 논리만을 주장한다. 내가 꿈꾸던 결혼생활은 무심한 남편 덕에 아파하고 서운해  하길 반복하며 어른이 되어갔다.

아이들이 크고 시간이 지나다보니 신경이 차츰 무디어진 것도 있지만 지인의 조언 덕이다. 가족 간에도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지 나처럼 너무 끈끈하게만 살려고 하면 마음을 다칠 때가 많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고 자라온 환경을 생각하며 수긍하게 된 다음부터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처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게다. 가족이란 서로 끈끈하게 붙어 있어야 사랑이라는 내 생각에 자물쇠를 풀었다.

사랑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입장을 바꿔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기념일을 챙겨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방안을 터득하니 상처받고 원망하던 근원은 내 마음이었다.

사랑의 거리두기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꼭 필요하다. 너무 붙어 살다보면 좋은 점도 많지만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은 그냥 넘어가고 잊기 마련이지만 서운한 점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가슴앓이 하다가 체념으로 혼자 끝을  내기 일쑤다.  

몇 십 년 살다보니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게 가장 좋은 선물 같다. 사실 사랑의 거리두기로 마음은 편해졌지만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게 아니란 걸 꽃집 앞을 지날 때면 느낀다. 빨간 장미가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거리두기가 요즘처럼 사회에 부각되는 것도 처음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세계 질서가 깨지고 있다. 뉴스보기가 겁나는 단계를 넘어 무섭기까지 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를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어느 특정지역의 사람들은 더 불안에 떨고 있다.

시작부터 시행착오로 마스크를 써야한다 안 써도 된다 해서 혼란을 겪었다. 그러다가 마스크가 큰 작용을 한다며 꼭 쓰라는 방침을 발표하자 전국의 마스크가 동이 나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다. 환자가 자꾸 늘어나면서 예방수칙도 다양하게 늘어났다. 그중에 비말감염이 원인이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떨어져 줄을 서는 풍경이 자연스럽다. 식당에서는 마주 앉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앉기도 하고 한자리 건너 앉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이 바탕이 된다.

다소 서운함이나 거리를 느낄 수 있지만 본인이나 다른 사람의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바이러스가 종식되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일이니까 잠시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사랑의 거리두기를 실천한다고 자부하는 나는 여전히 허전함을 종식시키기 어려울 모양이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 손에 꽃다발이 들려있다. 아들이 시켜서라고 어색하게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요동치는 심장소리를 들킬까봐 눈치를 보면서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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