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와의 시간
라니와의 시간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19.12.3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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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순 수필가.
이명순 수필가.

탁자를 사이에 놓고 앉아서 둘이 눈싸움을 하듯 쳐다본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 앉았다. 내가 야단을 치면 라니는 귀를 막는다. 그리고 러시아 말로 혼자 중얼거린다. 억양이 강해서인지 화가 많이 나서 말하는 것 같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러시아 말을 따라하면 엉터리로 따라하는 내 말이 우스운지 라니가 먼저 배시시 웃는다. 야단을 치다 나도 따라 웃으며 작은 공간 안에 웃음꽃이 핀다.
라니는 초등학교 1학년 남자 아이다.

아빠는 터키, 어머니는 러시아 사람이다. 러시아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러시아 말을 잘 하고 터키 말도 조금 할 줄 알지만 아직 한국어는 익숙하지 않다. 라니와는 한국어 공부를 위해 처음 만났다.

웃을 때 보조개가 귀여운 남자 아이고 체력도 매우 뛰어나다. 한국말을 못해서 그렇지 다른 것들은 잘하는데 언어 소통에는 당연히 문제가 있었다. 한국 문화가 낯설어서 그런지 학교 생활도 산만하고 집중력도 떨어지는 편이었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고집도 센 편이라 처음에는 잘 따라주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멋대로 돌아다니고, 책을 보자고 하면 재미없는 거라며 딴 짓을 하는 등 청개구리 같이 행동해 난감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세 번... 만남의 횟수가 늘어가면서 조금씩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흥미를 느끼는 것에는 놀랄 정도로 집중하고 승부욕도 강해서 모든 꼭 이겨야 했다.

게임을 좋아하니 책을 읽거나 쓰는 것도 시간을 정하고 게임으로 해야 했고, 한글 카드 놀이도 게임으로 해야 했는데 지게 되면 토라졌다가 마주 보고 웃으면 금방 풀어져 자신이 만족할 때 까지 하자고 졸라댄다.

모든 놀이를 다 좋아했지만 한글 공부만 어렵다고 싫어하는 라니와 한글 공부만 해야 하니 매일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면서 정이 쌓였다. 어느 날은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교실로 뛰어갔다 와서 작은 손을 내민다. 청포도 사탕 한 알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거라며 먹으라고 한다. 그렇게 만남의 횟수가 늘어가며 나아지기만 하면 좋을 텐데 어느 날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듯 수업을 거부하면 작은 아이를 상대로 야단을 치는 내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다.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워야 하니 당연히 어렵고 재미없겠지만 수학은 또래보다 잘했다. 수학 문제를 풀 때는 집중력이 매우 뛰어났고 내가 말하면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미소짓는다. 가만있으란 신호다.

자신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마냥 귀엽다. 팔씨름을 하자며 의기양양해서 어른인 나를 한 번에 이기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커서 운동선수하면 좋겠다는 내 말에 장래희망은 유튜버라고 단호히 말할 줄도 안다.

아이든 어른이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다그치며 아이를 굴레 속에 가두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교육 환경도 좋아져서 초등학교 교과목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아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다.

라니가 그런 한국 학교의 교육 환경을 잘 따라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공부하라고 야단칠 일도 없는데 정이 들었는지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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