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영배(戒盈杯)의 절제
계영배(戒盈杯)의 절제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19.01.1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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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며칠 전 아는 분이 밖에서 점심을 먹자며 전화를 하셨다. 다음 수업이 있어서 시간이 없었지만, 속상해 하고 계셔서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사 드리려고 만났다.

마주하자마자 서운한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직원들 간에 회식처럼 밥을 먹는 일이 몇 번 있었고 그 때마다 본인에게만 연락을 안 해서 기분이 언짢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또 그런 일이 있고 보니 눈물이 나더란다. 본인은 함께 먹자고 해도 나갈 상황이 안 되겠지만, 연락조차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문득 상대방의 지나친 배려로 인해 생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흔하게 하는 말이 '바쁘시죠?'이다. 그러면 '아니요, 괜찮아요.'라고 대답한다.

요즘은 직업이 있든 없든 누구나 바쁘기는 매한가지이다.나 또한 바쁘지만 그 대답이 꺼려진다. 전에 한 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상대방은 나를 배려한다며 제외시켜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상대방을 위한다며 단정 짓는 지나친 배려는 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배려 뿐 아니라 사랑도 그러하고 세상 이치가 그러함에도 넘치는 것이 화근이다.

컵에 물을 따르다가 실수로 넘치게 부었다. 물을 닦으며 지인이 들려 준'계영배'를 떠올렸다. 중국 고대에 만들어진 '계영배'라는 술잔모양의 그릇이 있다. 이 그릇은 '넘침을 경계하는 잔'으로 그릇에 술이나 물을 부어 70% 이상 채워지면 모두 밑으로 흘러가도록 만들어졌다.

지나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녀 고대 중국에서 하늘에 정성을 드리며 만들어졌던 '의기'(儀器)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의 거상인 임상옥은 이 계영배에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함께 죽기를 바란다.'라는 戒盈祈願 與爾同死(계영기원 여이동사) 문구를 새겨 넣고 항상 자신의 욕심을 다스렸다고 한다.

가득 채울수록 아래로 떨어져 비워내는 '계영배'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가르침을 주는 잔이다.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니 지나치게 채우려는 마음이 앞서 실수도 잦았고, 후회도 많았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삶으로 정신이 피폐해졌다. 버리고 비우는 일이 쉽지 않아서 몸에 맞지 않는 옷도 몇 년째 그대로다. 이 참에 내 삶의 지표를 심도 있게 고민해 봐야겠다. 컵에 가득 찬 물을 조심스레 들어서 마셨다. 7할만 채우는 '계영배'의 부족함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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