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입어 보는 곳
사랑을 입어 보는 곳
행복의 뜨락
  • 이재선
  • 승인 2017.06.2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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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선 수필가.

내가 좋아하는 오월이다. 어린잎들이 성숙해져서 청년다워지는 계절 오월이다. 오월이면 또 마음을 성숙하게 만드는 품바축제가 음성에서 열린다. 품바축제 때 내가 속해 있는 문인협회에서는 품바의상 체험과 교복체험을 맡았다.

품바축제장을 찾아 올 사람들을 위해서 문인협회회원들은 옷감에 염색을 하고 정성을 다해서 바느질을 한다. 해마다 축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피곤하고 지치기도 하지만 품바축제를 널리 알리려면 피곤도 잠시 미루어 두고, 품바 옷을 만드는 손길만 더 바빠진다.

품바축제는 최귀동 어르신을 기리기 위한 축제다. 고향이 이 곳인 난 실제로 최귀동 어르신을 많이 만나 보았다. 이 십리 먼 길을 새벽에 출발하여 아침밥을 푸기 전에 대문 밖에 서있던 할아버지였다. 엄마가 넉넉지 않은 밥상에서 할아버지 몫을 챙겨주는 것이 우리집 식구들은 불만이었다. 식구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 그릇의 밥을 퍼서 두었다. 어쩌다 오지 않는 날은 어디가 아픈 게 아닌가하며 종일 걱정을 멈추지 않았다.

거지는 말 그대로 내 것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구걸을 하는 사람이다. 본인만 배 고프지 않으면 되는데도, 최귀동 어르신은 구걸한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어르신이다. 어르신의 작은 나눔이 불씨가 되어 배고프고 머무를 곳 없는 사람들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준 곳이 음성이다. 우리 음성은 사랑의 씨앗이 되어주신 최귀동 어르신의 뜻을 널리 알리려고 일 년에 한 번씩 품바축제를 하고 있다.

우리 문협에서는 품바의상체험을 하면 즉석에서 사진을 인화해주는 서비스를 무료로 해주게 되었다.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와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인화되어 나온 사진을 보며 누구랄 것 없이 흐뭇해하고 기뻐한다.

품바축제가 시작하는 날 서울에서 여자 네 명이 왔다. 친구들과 이 옷 저 옷을 입어보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깨끗하고 예쁜 옷들이 옷 가게마다 서로를 뽐내며 가득 차 있는 데도 이 곳 품바의상체험이 인기가 좋은 것은, 옛것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본능이 숨 쉬고 있어서인 것 같다.

옛날에 시골 살 때 품바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고, 지난날을 추억하며 즐길 수 있는 축제장이 있어서 좋단다. 해마다 올 것을 약속하며 그녀들은 다른 체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라져가고 잊혀져 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기억 속에 남겨두고 후손들에게 뜻을 기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작은 사랑이라도 나눔을 실천한 최귀동 어르신의 깊은 뜻을 품바축제에 와서 느낀다면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지금도 가끔씩 현대판 최귀동 어르신 같은 분들의 사연이 뉴스 지면을 채울 때 말 없는 감동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품바의상체험부스 옆으로 각 읍, 면에서 옛날 품바들이 생활했던 곳을 재현해서 지어놓은 움막들이 줄을 서듯 잇달아 있다. 움막집에서 맞은편을 바라보니 미끈하게 솟아 오른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서있다.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움막에서 실천한 사랑과 고층빌딩에서 베푸는 사랑은 형식만 다를 뿐이지 그 따뜻한 마음은 같지 않을까? 사랑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곳, 이곳은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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