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주는 남자
행복을 주는 남자
행복의 뜨락
  • 음성뉴스
  • 승인 2016.08.1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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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숙 수필가.

서랍을 정리하다가 인쇄된 메일 뭉치를 발견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 보니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나를 15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메일의 주인공인 그 남자에게 전화했다. 지난 날 주고받았던 메일 이야기하면서 지나간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의 많은 시간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고 말하는 남자.

그 남자와의 만남은 새천년이 시작되던 해였다. 군대 제대하고 다니던 학교를 쉬면서 진로를 바꾸려고 재수할 때였다. 딸도 원하는 학교에 가기 위해 서울에서 재수했을 때 함께 공부하던 친구다. 처음에는 어른들과의 교류가 적었는지 나를 대하는 것을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어색해하고 어정쩡한 말투는 어색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원하던 것에 실패한 그 남자의 재도전을 위해 딸과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울산에서 출발해서 포항에 도착해 내 친구 집에 들렀다. 도전하기에 앞서 확고한 신념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라며 머리를 빡빡 깎아보라고 권했다. 그런다고 하기에 미용사인 친구에게 부탁해서 스님처럼 깎았다.

반들거리는 민머리를 본 아들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짧게라도 머리카락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자가 한번 마음먹으면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내 생각에 따르긴 했지만 낙담한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다시 무를 수도 없으니 나는 모른 체 했다.

정동진에 강릉 쪽으로 가다보면 등명 낙가사가 있다. 절에 들어가 108배를 시켰더니 다 하고 내려오는데 다리가 떨렸는지 계단을 내려오지 못했다. 스파르타 교육기질이 있는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풀려면 절을 더 해야 한다며 낙산사의 부속 암자인 홍련암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한 번 더 108배를 하라고 했다. 다리가 아파 어정쩡한 모습으로 절을 하고 나오는 아들을 보고 어느 여행객이 스님이라고 불러서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한참을 웃었다.

다시 공부하러 고시원에 들어간 아들을 위해 나는 보문사에 갔다. 이번엔 그가 원하는 곳에 꼭 합격하기를 바리며 108 염주를 돌리면서 기도를 했다. 속살거리며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열심히 절하며 오로지 그 남자의 소원성취만을 빌었다. 숙소를 잡고 5일 동안 백팔염주를 삼십 번쯤 돌리면서 나름 정성을 다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모자지간이 되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의논하고 해결책을 찾아간다. 힘든 일이 있을 땐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모르는 것을 전화로 물으면 언제나 곧바로 해결해준다. 컴퓨터나 휴대폰을 하다가 막히면 바로 전화한다. 모르면 배워서라도 해결해주는 나의 영원한 맥가이버.

아들과의 만남이 행복이라고 했더니 어머니를 만난 것이 자기에겐 행운이라는 아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면 사람들에게 부딪칠까 온몸으로 보호하며 자리가 생기면 얼른 나를 앉게 했다.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다니던 때 “어머니 얼른 여기 앉으셔요."하면 믿기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는 주위의 눈길에도 행복했었다.

하루는 딸, 아들과 함께 여행 가서 숙소를 잡았다. 서로 계산을 하겠다고 싸우다가 “어머니 이번엔 저한테 양보하세요."라고 하자 프런트에 있던 사람이 연상의 연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딸이 “헐~ ."하면서 우리 엄마 젊은 줄 착각하는데 더 보태 준다고 해서 큰소리로 웃었다. 딸하고 의견 충돌이 있으면 중간에서 조율도 잘 해 주는 아들.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는 아들이 있어 지금도 나는 매우 행복하다.

아들과 나는 전생에 어떤 인연으로 만난 것일까.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전생의 인연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만남보다는 그 인연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해야만 오래오래 소중한 인연이 이어질 것이다. 언제나 행복을 주는 그 남자. 아들과 오래오래 웃으며 사랑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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